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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땅 찾기 19세기 '열풍'

조인스랜드_박성래 2019. 12. 23. 13:23

조상당 찾기 19세기 '열풍' : 19세기엔 함열궁씨 선영이 있는 만경, 양주, 고부, 함열, 성당 등지에서 산 관련 소송이 많이 일어났으며, 소송 대상자는 그 지역 향리가 많았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전라 고부지역 함열 남궁씨 집안의 소송과 청원 소송 문서(5호)’에서 이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전라남도 양무감리 김성규의 임명장(1899년)*


이는 고부에 살다가 50여 년 전에 서울로 이주해 사는 함열남궁씨 고부 문중의 종손인 남궁인권 씨가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고문서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명문이랄 수 있는 남궁씨 집안의 문서로, 그들이 선영을 중심으로 한 송사 과정을 매우 치밀하게 살필 수 있는 한편 더욱이 고부지역을 이해할 수 있는 드문 자료로서 지역사 연구에도 활용 가치가 높다.
이 자료는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서울, 경기 인근에 대대로 살던 집안이 전라도 고부로 흩어져 거주하게 된 계기와 조선 후기 선영(先塋)을 조성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 향리들과의 마찰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이 집에 소장된 문서는 모두 85점으로, 모두 11개 사건으로 구분된다. 이중 8개의 사건은 산송(山訟)이고, 2개는 같은 집안 내부에서 벌어진 매매송과 연루되어 있고, 또 다른 사건은 효자 정려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청원이다.
산송 문서가 많은 가운데 함열궁씨 선영이 자리한 만경, 양주, 고부, 함열, 성당 등지에서 소송이 많이 일어났으며, 소송 대상자는 그 지역 향리가 많았다.
공유 재산이던 산림이 개인의 재산권으로 정착되는 문제이며, 후일 자신의 묘역을 조성하고 수호하려는 집안간, 혹은 집안 내부간의 충돌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등장한다.
조선시대의 소송은 노비송, 전답송, 산송으로 중심의 축이 옮겨졌다. 19세기 이후의 송사는 산송이 주종이 됐다. 댁의 산송이 어떠한지가 편지 인사말 투식이 될 만큼 일상화되어 어느 집이나 한두 건씩은 으레 끼고 있다.
이같은 송사는 장기화되는 양상을 띠며, 어느 경우는 법리를 넘어 소송 당사자인 두 집안의 세력이 서로 길항하며 어느 이긴쪽으로 정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송사가 장기화 되는 요인 중 하나는 어느 사람의 무덤이 설사 불법적으로 조성됐다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강제로 파내가는 것이 불법이고, 그 자신이 직접 이장하는 것만을 헝요하는 점에 있었다. 설사 이장하라는 관의 명령이 내려지더라도 묘의 주인이 모진 형벌을 경디며 집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강제로 이행시킬 수 없었다.
‘전라도 고부 지역 함열 남궁씨 집안의 소송과 청원’은 만경 산송, 양주 산송, 고부 산송1, 고부 산송2, 함열 산송, 고부 산송3, 고부 산송4, 고부 산송5, 성당 매매송, 함열 매매송, 고부 상서 등 세부 자료로 구성됐다.
이 전통생활문화 자료집은 발굴한 자료를 연구자 또는 일반인이 지역의 자료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료별로 해제, 원문 이미지, 탈초(脫草), 번역으로 구성됐다.
한편 '전통생활문화 자료집(4호) ‘서울 성북구 정릉동 공청 관련 자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을 조사하면서 발굴된 문서와 현판 등으로 현재 정릉2동 노인정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이다. 이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마을 공유재산인 공청(公廳)과 관련한 자료로 현판, 회칙, 회의록, 산신제 관련 문서 등이다. 따라서 이 지역 자료는 현대 마을조직의 변화 및 마을의례 연구에 큰 의미가 있다. /이종근 기자

*역둔토 조사에 대한 탁지부 훈령(1909년)*
*임시토지조사국원 양성소 졸업사진(1911년)*